요즘 거의 매일 몇 장씩 성경을 읽고 있다. '종교를 믿으려면 제대로 믿어야지'라는 일말의 의무감에서 시작한 성경읽기가 요새는 매일매일의 즐거움이 되었다. '실감나기'때문이다.
성경속에 나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검은 글자와 흰 종이가 아닌, 하나하나 드라마 장면처럼 내 머릿속에서 재현되는 걸 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옛날에는 그토록 현실감 없고 나와 관계없이 느껴지던 내용들, 어른들의 이야기가 이제는 나의 이야기가 되어버린 탓일까. 성경 속에 등장하는 수 만 가지 인간 군상들의 모습은 정말 흥미진진하는 느낌까지 들게 된다. 어느새 성경속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을 정도로, 나도 인생의 다채로움과 깊이를 알게 되어버린 것일까?
도서관의 프랑스 서적들 속에서 빅토르 위고의 책들을 끄적거리다가, 우연히 한 칸 위의 책을 집어들었다. 낯익은 이름의 책 제목 때문이다.
십보라.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라면 알겠지만, 십보라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 노예생활에서 벗어나게 한 지도자 모세의 아내이다. 그러나 그녀의 위대한 남편과는 달리 십보라가 언급된 성경 구절은 몇 개 되지 않는다.
성경을 읽었을 때에도, 사람을 죽이고 도망쳐 온 이집트인에게 딸을 내어준 그녀의 아버지나, 그와 결혼한 십보라나, 결코 범상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게다가 성경에 언급된 바로는 그녀는 구스족 출신의 흑인이다. 놀랍지 않은가? 모세의 아내가 흑인이라니. 게다가 그녀의 아버지는 아브라함의 서자 중 한 명인 미디안 부족의 제사장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백인일 터인데, 무슨 연유로 흑인 딸을 두게 된 것인지 그녀의 출생은 정말 미스터리다.
십보라는 도망자였던 자신의 남편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임을 꿈을 통해 진작부터 알고 있었고, 나약한 모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단련시켰다. 그리고 남편이 자신의 사명을 깨닫게 되자, 편안한 미디안에서의 생활을 버리고 그를 따른다. 남편의 동족들이 이스라엘에서 노예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녀는 참으로 대단한 선택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사회에 안착하지 못하고, 결국 친정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한 뒤에야 남편과 상봉하게 된다. 십보라가 모세의 곁을 떠나게 된 이유가 성경에 명확하게 적혀있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들이 있다.
혹자들은 제사장의 딸로 곱게 자란 십보라가 이스라엘 노예로서의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남편을 떠났다고 탓하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미리암이 하나님의 분노를 살 정도로 십보라에 대해 모세를 질책했던 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녀에 대해 갖고 있는 인식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이방인으로서 냉대받다가 결국 쫓겨난 것이다.
순수 혈통에 대한 집착이 강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입장에서 모세의 아내가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국제결혼을 보는 우리의 인식이 아직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처럼. 외모로 상대방을 판단하는 사람의 어리석음은 수천 년 전이나 지금에도 계속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아니하시고, 공의로서 심판 하시는데도 말이다. 결국 하나님은 십보라의 존재를 질책하는 미리암에게 한센병으로 벌을 내리셨다.
비단 미리암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가 이스라엘 여자가 아닌 구스 여자와 결혼했기 때문에, 하나남의 응답이 시원찮다고 생각하고 불평했을 것이다. 불평불만 가득하고 목이 뻣뻣한 자신들의 들보는 보지 못한 채 말이다. 흑인 아내를 둔 지도자,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들이 보기에는 너무나도 큰 허물이었다. 한때 살인자이자 망명자였던, 보잘것 없는 모세를 남편으로 받아주었던 조강지처였다는 사실도, 그녀의 피부색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신의 존재로 인해 지도자로서 남편의 권위가 흔들리고 있는 현실에서, 십보라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남편 곁을 떠나는 것 이었을 것이다. 수 년이 지난 뒤 남편과 재회했을 때에도, 이방인으로서 핍박받는 현실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게다가 어리석은 군중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아들들마저 잃고 만다. 남편과의 짧은 재회 때문에 아들마저 잃고 돌아온 십보라가 아버지의 땅에서 암살당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소설 속의 십보라는 나약한 남편을 한결같이 독려하고 용기를 주었으며,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던, 용기있고 강인한 여인이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현명하고 지혜로웠던 여인이었다.
몇 안되는 씨줄과 날줄을 가지고 작가인 마렉 알테르는 너무나 환상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내었다. 사실과 허구를 증명하는 것이 의미가 없을 정도이다. 그의 생생한 묘사력과 탁월한 상상력을 통해, 수 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결코 변하지 않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또렷이 드러나고 있다.
사람들은 지금도 외모로 상대를 판단하고 그 속에 담긴 진실을 읽지 못한다. 어째서 과거나 지금이나 이토록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는 것일까.
왜 하루하루의 일상에 대해 당연히 여기고, 감사하지 못하며, 끊임없이 불평불만을 토해내는 것일까. 채찍질에서 해방된 기쁨, 자신들을 해방시킨 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어느새 까맣게 잊어버린 채 -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았던 노예시절이 좋았노라고 불평을 토해내고, 이집트 신들을 본따서 만든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는 - 목이 뻣뻣하고 우둔한 그들의 모습이 결국 내 모습은 아닐런지.
<십보라>밖에 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마렉 알테르는 단숨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명이 되어 버렸다. <십보라>는 그가 쓴 '성경 속 여인 3부작'의 한 권이라고 한다. 한글로 번역된 <사라>도 읽어보아야 겠다. 나머지는 영문판을 구해서라도 읽어볼거다.
성경속에 나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검은 글자와 흰 종이가 아닌, 하나하나 드라마 장면처럼 내 머릿속에서 재현되는 걸 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옛날에는 그토록 현실감 없고 나와 관계없이 느껴지던 내용들, 어른들의 이야기가 이제는 나의 이야기가 되어버린 탓일까. 성경 속에 등장하는 수 만 가지 인간 군상들의 모습은 정말 흥미진진하는 느낌까지 들게 된다. 어느새 성경속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을 정도로, 나도 인생의 다채로움과 깊이를 알게 되어버린 것일까?
도서관의 프랑스 서적들 속에서 빅토르 위고의 책들을 끄적거리다가, 우연히 한 칸 위의 책을 집어들었다. 낯익은 이름의 책 제목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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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라면 알겠지만, 십보라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 노예생활에서 벗어나게 한 지도자 모세의 아내이다. 그러나 그녀의 위대한 남편과는 달리 십보라가 언급된 성경 구절은 몇 개 되지 않는다.
성경을 읽었을 때에도, 사람을 죽이고 도망쳐 온 이집트인에게 딸을 내어준 그녀의 아버지나, 그와 결혼한 십보라나, 결코 범상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게다가 성경에 언급된 바로는 그녀는 구스족 출신의 흑인이다. 놀랍지 않은가? 모세의 아내가 흑인이라니. 게다가 그녀의 아버지는 아브라함의 서자 중 한 명인 미디안 부족의 제사장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백인일 터인데, 무슨 연유로 흑인 딸을 두게 된 것인지 그녀의 출생은 정말 미스터리다.
십보라는 도망자였던 자신의 남편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임을 꿈을 통해 진작부터 알고 있었고, 나약한 모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단련시켰다. 그리고 남편이 자신의 사명을 깨닫게 되자, 편안한 미디안에서의 생활을 버리고 그를 따른다. 남편의 동족들이 이스라엘에서 노예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녀는 참으로 대단한 선택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사회에 안착하지 못하고, 결국 친정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한 뒤에야 남편과 상봉하게 된다. 십보라가 모세의 곁을 떠나게 된 이유가 성경에 명확하게 적혀있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들이 있다.
혹자들은 제사장의 딸로 곱게 자란 십보라가 이스라엘 노예로서의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남편을 떠났다고 탓하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미리암이 하나님의 분노를 살 정도로 십보라에 대해 모세를 질책했던 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녀에 대해 갖고 있는 인식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이방인으로서 냉대받다가 결국 쫓겨난 것이다.
순수 혈통에 대한 집착이 강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입장에서 모세의 아내가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국제결혼을 보는 우리의 인식이 아직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처럼. 외모로 상대방을 판단하는 사람의 어리석음은 수천 년 전이나 지금에도 계속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아니하시고, 공의로서 심판 하시는데도 말이다. 결국 하나님은 십보라의 존재를 질책하는 미리암에게 한센병으로 벌을 내리셨다.
비단 미리암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가 이스라엘 여자가 아닌 구스 여자와 결혼했기 때문에, 하나남의 응답이 시원찮다고 생각하고 불평했을 것이다. 불평불만 가득하고 목이 뻣뻣한 자신들의 들보는 보지 못한 채 말이다. 흑인 아내를 둔 지도자,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들이 보기에는 너무나도 큰 허물이었다. 한때 살인자이자 망명자였던, 보잘것 없는 모세를 남편으로 받아주었던 조강지처였다는 사실도, 그녀의 피부색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신의 존재로 인해 지도자로서 남편의 권위가 흔들리고 있는 현실에서, 십보라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남편 곁을 떠나는 것 이었을 것이다. 수 년이 지난 뒤 남편과 재회했을 때에도, 이방인으로서 핍박받는 현실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게다가 어리석은 군중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아들들마저 잃고 만다. 남편과의 짧은 재회 때문에 아들마저 잃고 돌아온 십보라가 아버지의 땅에서 암살당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소설 속의 십보라는 나약한 남편을 한결같이 독려하고 용기를 주었으며,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던, 용기있고 강인한 여인이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현명하고 지혜로웠던 여인이었다.
몇 안되는 씨줄과 날줄을 가지고 작가인 마렉 알테르는 너무나 환상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내었다. 사실과 허구를 증명하는 것이 의미가 없을 정도이다. 그의 생생한 묘사력과 탁월한 상상력을 통해, 수 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결코 변하지 않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또렷이 드러나고 있다.
사람들은 지금도 외모로 상대를 판단하고 그 속에 담긴 진실을 읽지 못한다. 어째서 과거나 지금이나 이토록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는 것일까.
왜 하루하루의 일상에 대해 당연히 여기고, 감사하지 못하며, 끊임없이 불평불만을 토해내는 것일까. 채찍질에서 해방된 기쁨, 자신들을 해방시킨 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어느새 까맣게 잊어버린 채 -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았던 노예시절이 좋았노라고 불평을 토해내고, 이집트 신들을 본따서 만든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는 - 목이 뻣뻣하고 우둔한 그들의 모습이 결국 내 모습은 아닐런지.
<십보라>밖에 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마렉 알테르는 단숨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명이 되어 버렸다. <십보라>는 그가 쓴 '성경 속 여인 3부작'의 한 권이라고 한다. 한글로 번역된 <사라>도 읽어보아야 겠다. 나머지는 영문판을 구해서라도 읽어볼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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